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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에서의 놀이와 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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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에서의 능동적 활동의 위치

 

다소간은 교육개혁가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다소간은 아동심리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말미암아, 또 다소간은 교실수업의 직접 경험으로 말미암아, 지난 20여 년간 학교 공부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위의 세 가지는 모두 학습자의 경험과 능력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 가르침에 따라 아동 청소년이 학교 바깥에서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활동, 그들이 놀이나 일로서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형식의 활동을 교실수업에 도입하게 되었다. 현대 심리학은 일반적인 기성의 부소능력이 있다는 옛날 이론 대신에,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교실수업의 경험은, 아이들이 그 자연적인 충동을 활용하는 신체적인 활동을 할 기회를 갖게 될 때 학교에 다니는 것은 기쁨이요 학습은 더 쉬워지며 학생들의 행동관리의 부담도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놀이나 게임, 손으로 만드는 일을 순전히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규교과 공부에서 오는 지긋지긋한 긴장을 다소간 풀어준다는 데에 그 취지가 있다. 그러나 놀이나 그와 비슷한 활동을 순전히 일종의 기분전화으로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정신활동에 관한 연구 결과가 명백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탐색하고 도구와 자료를 조작하고 만들고 기쁜 감정을 표현해 보는 등등의 생득적 경향성은 근본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적인 경향성에 의하여 일어나는 활동이 정규 학교 공부의 한 부분이 될 때, 학생은 전인적으로 여기에 전념하게 되고, 학교 안에서의 삶과 학교 밖에서의 삶 사이의 인위적인 간극이 좁아지며, 특이하게 교육적 효과를 가지는 온갖 자료와 과정에 주의가 집중되고, 정보와 지식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협동적인 교섭이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교육과정에서 놀이와 일에 결정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잠정적인 편의나 순간적인 기분전환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지적, 사회적 근거에 의하여 당연히 취해져야 할 조치이다.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효과적인 학습의 정상적인 조건을 확보하는 일, 다시 말하면 지식의 획득이 단순히 학교 공부로서가 아니라 유목적적인 활동을 통하여 저절로 가능하게 되도록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놀이와 일은 앎의 초기 단계가 나타내는 특성 하나하나에 상응한다. 바로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앎의 초기 단계는 무엇인가를 할 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사물에 익숙하게 되고 일하는 과정을 터득하게 되는 그러한 단계이다. 의식적인 철학이 생겨나기 이전의 희랍인에게 있어서 '테크네'라는 하나의 단어가 기술과 지식을 동시에 가리켰다는 것은 여기에 좋은 시사를 준다. 플라톤은 지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구두 수선공, 목수, 악기 연주자 등의 지식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기술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 아닌 한) 목적의식, 자료나 내용에 대한 통달, 기구의 자유로운 구사, 그리고 확실한 절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때 지적인 기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교육자가 보기에, 아이들이 통상 학교 밖에서 놀이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그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할 이유로 생각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할 만한 그런 일을 되풀이하는 데에 그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는 이 이유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의 개척시대에는 학교 밖에서 하는 일이 확고하고 가치있는 지적, 도덕적 훈련이 되었다. 여기에 비하여 책,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귀하였고 쉽게 가질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은 좁고 조잡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사회가 이러한 조건에 있을 대에는 학교 활동을 책에 집중시키는 것이 타당한 조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태는 대단히 달라졌다. 특히 도시에서 젊은이들이 종사할 수 있는 일은 대부눙 비교육적 또는 반교육적인 것이다. 소년노동을 방지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로 되어있는 것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반면에 인쇄물은 값이 싸지고 보편적으로 배포되고 있으며 지적 교양의 기회 또한 대단히 확장 되어서 옛날식의 책으로 하는 공부는 그것이 한때 가졌던 중요성을 거의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 밖의 상황에서는 놀이와 일의 교육적 효과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거기서는 교육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얻어지는 교육적 성장도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은 현재의 산업사회의 결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이 결함은 올바른 발달에 대하여 거의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놀이는 주위의 성인생활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점과 함께 조악한 측면을 용인, 재생하고 있다. 학교의 과업은 놀이와 일이 바람직한 정신적, 도덕적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놀이나 게임, 손으로 하는 일과 수공 연습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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